석유산업 자유화 초기 원유와 석유제품에 동일한 관세가 적용됐던 적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들어 원유와 석유제품간 관세 차등화가 이뤄지면서 최대 4%p까지 격차가 발생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 정부는 원자재인 원유와 완제품인 석유의 관세율에 차등을 두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제 출발점으로 다시 선회하게 됐다.

정부는 최근 서민물가안정대책의 일환으로 원유와 석유제품에 동일한 관세율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추가로 완제품 석유수입 관세를 무세화하는 것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석유수입업에 대한 비축의무도 개선한다는 것이 정부의 생각이다.

정유사와 석유수입사는 비슷한 계산식에 근거한 비축 의무를 부과 받고 있는데 석유수입사의 비축 부담을 줄여 외국산 완제품의 도입을 촉진하려 하고 있다.

비축 의무가 줄어 드는 만큼 석유수입사들의 자금 부담은 줄어들게 되니 일견 석유 도입이 촉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정부가 지금까지 정유사와 석유수입사에 동일한 방식의 비축의무를 부과하는 배경은 에너지사업자의 규모에 걸맞는 에너지 수급 의무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에너지 수급은 곧 에너지 안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깊은 고민과 명분이 없는 정책이 어디에 있겠는가?

다만 정부 정책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라는 점에 비춰 보면 최근의 일련의 조치는 상당히 우려스럽다.

◆ 정부 정책 신뢰할 수 없다

얼마 전 한 대기업 석유수입사 임원에게 석유수입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 본 적이 있다.

그 답은 두가지 였다.

국제 석유가격이 너무 높아 수입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정부 정책을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이 두 번째 이유였다.

석유수입업이 자유화된 이후 원유와 석유제품간의 관세가 차등화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었던 이 임원은 기업 규모가 클 수록 장기적인 안목에서 사업 전략을 짜고 실행해야 하는데 정부의 에너지 정책은 종잡을 수도 또 예측 가능하지도 않아 섣불리 나설 수가 없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원유와 석유간의 관세를 차등화할 당시에도 정부는 나름의 명분이 분명했고 관세를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는 지금 역시 그럴만한 사유가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시장은 석유산업에 대한 정책을 이제는 믿어도 되는지 정부에게 묻고 있다.

석유수입사들은 신명나게 일을 벌여도 되는 것인지 또 정유사들은 정부가 취한 최근 일련의 조치들이 소비지정제주의를 포기한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지 정부에게 묻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수입 석유제품의 시장 점유율이 후발 정유기업의 마켓 쉐어와 맞먹는 7%대 까지 차지했던 적이 있었다.

국제 석유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가격대의 수입 석유가 밀려 오면서 대규모 장치 산업인 정제기업들은 상당한 압박을 받았고 그 결과는 지금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표현되는 정유사가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고 심지어 부도라는 극단의 사태로 내몰렸다.

2001년 인천정유는 만기도래한 모 은행의 결재대금 440억을 막지 못하며 결국 법정관리를 받는 이른 바 ‘부도’를 냈다.

이 회사는 법정관리라는 수단으로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자체 신용으로 원유를 도입할 길이 없어 외국계 석유 트레이딩 회사로부터 현금을 주고 원유를 구매하는 신세로까지 내몰렸다.

현대오일뱅크는 2000년과 2001년 연속 각각 3312억원과 1931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후 가동율을 줄이고 구조조정 등 강력한 경영정상화 노력을 기울인 끝에 흑자로 전환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이후로도 상당 기간동안 4~5조원에 달하는 매출에서 500억원대의 순익을 거두는데 그쳤다.

물론 당시 정유사의 경영 악화 원인 모두가 석유수입업을 장려한데서 비롯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정부의 보호 장벽 아래서 성장하면서 체질 개선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던 면도 배제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고정비 부담이 적은 석유수입업이 활성화되는 환경이 조성되면 대규모 장치산업인 내수 정제기업들의 경영은 또 다시 심각하게 위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 석유산업 근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돼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유가로 수출 정제마진이 크게 개선되면서 최근 일부 정유기업의 순익이 1조원대를 넘어서는 호황을 누리고는 있지만 경영환경은 언제 어떻게 뒤바뀔 지 모를 일이다.

유가와 원유 수급, 전 세계적인 정제시설 가동 현황 등 다양한 경영 환경 변수를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정부 정책에 대한 예측은 가능해야 한다.

불과 수년전 정유 기업들이 극단의 어려움을 겪었던 것 처럼 또 다시 위기의 순간이 닥쳐 올 수 있는데 그때 정부는 또 다시 ‘소비지 정제주의’를 부르짖으며 정유 산업을 보호하려는 장막을 쳐서는 안된다.

설령 정제 기업이 또 넘어지고 외국 기업으로 주인이 바뀌더라도 정책의 연속성과 예측 가능성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국제 석유가격이 올라 수익성이 떨어지면 석유 수입에서 손을 털어 버리는 석유수입사를 대신해 정유사에게 에너지 안보의 책임을 물어서도 안된다.

한때 글로벌 스탠다드를 내세우고 소비지정제주의를 신봉하던 정부가 자신들도 어쩔 수 없는 고유가 환경에 닥치자 내수 정제기업을 경쟁으로 내몰아 기름값을 낮추겠다며 완제품 석유 수입을 장려하는 정책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 처럼 또 다른 상황에서 또 다른 이유를 내세우며 석유산업 정책의 근간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된다.

소비지 정제주의는 소비국들이 원유를 들여와 자국내에서 석유제품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방식이다.

국제 시장 규모가 작아 작은 수요 변동에도 가격과 수급이 출렁이는 석유제품을 직접 자국내에서 생산해 비용의 경제성과 수급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잇점으로 전 세계 국가들이 장려하고 채택하고 있는 정책 기조가 바로 소비지정제주의다.

그렇다고 내수 정제 지향적인 정책이 반드시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국가 에너지 정책의 근간이 되어 왔던 소비지 정제주의를 이렇게 간단한 논리로 쉽게 내팽겨치는 선택에 정부는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에너지플랫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